직가(直街)에서의 선택
오늘 본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지금 직가(直街)에 있는 바울의 이야기로, 여기에서 바울, 아나니아, 주님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1. ( 속단 )하지 ( 말아야 ) 합니다.
우선 눈이 먼 바울이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직가라는 곳에 있다는 것은 “굽은 길을 곧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가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있는 바울을 찾아 그에게 안수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매사에 기도하면서 순종하던 경건한 사람인 아나니아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나니아는 바울같은 인간은 주님의 은총을 입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판단과 생각은 바로 주님의 능력에 대한 속단인 것입니다. 즉 바울 같은 인간에겐 아무리 주님의 은총이 임해도 속수무책일 것이라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속단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 순간, 사람에 대한 속단이 주님의 능력에 대한 속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 그릇 )으로 ( 선택 )하셨습니다.
바울에 대해서 속단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는 바울을 가리켜 당신께서 친히 선택하신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택이란 많은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했다는 것은 나머지를 버렸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그 이후로 선택받은 바울은 하나님을 보배로, 자신을 질그릇으로 고백하곤 하였습니다. 질그릇이란 잿물이나 유약을 쓰지 아니하고 질흙만으로 구워진 그릇으로, 그 투박하고 거친 모양은 그릇 중에서도 최하품입니다. 즉 본래 주님을 대적하던 바울은 주님 앞에서 질그릇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을 주님께서 당신의 그릇으로 택해주셨습니다. 이 이후 바울의 인생이 가치로와 진 것은 질그릇인 그 자신으로 인함이 아니라, 그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3. ( 육체 )의 건강보다 ( 영적 회복 )이 더 중요합니다.
이제 바울의 인생은 전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그가 지체 없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증거는 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던 바울이 다시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태여 그런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바울이 음식을 먹으매 강건해졌다”고 굳이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실제로는 눈의 비늘을 벗고 세례를 받은 뒤에는 온갖 핍박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고 해서 바울이 육체적 건강을 누렸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평생 지병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건강보다도 영적인 건강이 더욱 중요합니다.
1. ( 속단 )하지 ( 말아야 ) 합니다.
우선 눈이 먼 바울이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직가라는 곳에 있다는 것은 “굽은 길을 곧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가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있는 바울을 찾아 그에게 안수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매사에 기도하면서 순종하던 경건한 사람인 아나니아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나니아는 바울같은 인간은 주님의 은총을 입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판단과 생각은 바로 주님의 능력에 대한 속단인 것입니다. 즉 바울 같은 인간에겐 아무리 주님의 은총이 임해도 속수무책일 것이라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속단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 순간, 사람에 대한 속단이 주님의 능력에 대한 속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 그릇 )으로 ( 선택 )하셨습니다.
바울에 대해서 속단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는 바울을 가리켜 당신께서 친히 선택하신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택이란 많은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했다는 것은 나머지를 버렸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그 이후로 선택받은 바울은 하나님을 보배로, 자신을 질그릇으로 고백하곤 하였습니다. 질그릇이란 잿물이나 유약을 쓰지 아니하고 질흙만으로 구워진 그릇으로, 그 투박하고 거친 모양은 그릇 중에서도 최하품입니다. 즉 본래 주님을 대적하던 바울은 주님 앞에서 질그릇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을 주님께서 당신의 그릇으로 택해주셨습니다. 이 이후 바울의 인생이 가치로와 진 것은 질그릇인 그 자신으로 인함이 아니라, 그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3. ( 육체 )의 건강보다 ( 영적 회복 )이 더 중요합니다.
이제 바울의 인생은 전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그가 지체 없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증거는 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던 바울이 다시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태여 그런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바울이 음식을 먹으매 강건해졌다”고 굳이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실제로는 눈의 비늘을 벗고 세례를 받은 뒤에는 온갖 핍박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고 해서 바울이 육체적 건강을 누렸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평생 지병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건강보다도 영적인 건강이 더욱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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