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주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바울은 그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제3의 인생길을 출발하게 됩니다.
1. 만나 본적도 없는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단순히 “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박해한다’는 동사는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따라다니면서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살아생전에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적조차 없었으니,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핍박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단지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입니다. 더구나 당시 그는 스스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고,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습니다.
2. 하나님은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특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는 단어는 “연령이나 체중이 작다”는 말이 아니라, 존엄성이나 인격 혹은 품성 면에서 모자라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를테면 인간 중에서 가장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수준 미달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처럼 하찮은 인간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핍박했던 모든 남녀노소 그리스도인들과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마주치는 자에게 행하는 모든 것이 곧 삼위일체 하나님께 행하는 것일진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암흑)의 사흘 길을 (홀로) 통과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가라고 지시하셨던 그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바울을 위해 예비해 두신 아나니아가 즉시 나타나 그를 영접해서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잠잘 곳을 마련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앞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날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흘로 인해 바울은, 자신을 홀연히 휘감았던 그 빛의 의미를, 자신의 눈이 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자신의 그릇된 과거를,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그 모든 것들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사흘이 있었기에, 옛 사람 사울은 죽고 새 사람 바울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흘 동안 거두신 주님의 손길, 사흘에 걸친 주님의 침묵이야말로 진정으로 사울을 영적 거인으로 발돋움시켜 주시기 위한 발판이요, 매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가장 큰 응답십니다.
1. 만나 본적도 없는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단순히 “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박해한다’는 동사는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따라다니면서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살아생전에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적조차 없었으니,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핍박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단지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입니다. 더구나 당시 그는 스스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고,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습니다.
2. 하나님은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특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는 단어는 “연령이나 체중이 작다”는 말이 아니라, 존엄성이나 인격 혹은 품성 면에서 모자라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를테면 인간 중에서 가장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수준 미달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처럼 하찮은 인간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핍박했던 모든 남녀노소 그리스도인들과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마주치는 자에게 행하는 모든 것이 곧 삼위일체 하나님께 행하는 것일진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암흑)의 사흘 길을 (홀로) 통과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가라고 지시하셨던 그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바울을 위해 예비해 두신 아나니아가 즉시 나타나 그를 영접해서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잠잘 곳을 마련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앞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날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흘로 인해 바울은, 자신을 홀연히 휘감았던 그 빛의 의미를, 자신의 눈이 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자신의 그릇된 과거를, 또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그 모든 것들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사흘이 있었기에, 옛 사람 사울은 죽고 새 사람 바울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흘 동안 거두신 주님의 손길, 사흘에 걸친 주님의 침묵이야말로 진정으로 사울을 영적 거인으로 발돋움시켜 주시기 위한 발판이요, 매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가장 큰 응답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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