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시간이, 교회력이라는 사려 깊은 호흡 안에서 마지막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세속의 달력이 가리키는 연말과는 결이 다릅니다. 11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이는 소박한 끝이 아니라 우주의 심연으로 우리를 이끄는 영원한 시작의 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익숙하게 반복되는 시간의 순환 속을 걸으면서도 결코 익숙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을 새롭게 직면합니다. 세상 모든 권세가 힘과 소유, 강압과 쟁취에 기대고 서 있을 때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껴안음, 정죄가 아니라 용서, 파멸이 아니라 생명의 부름입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날은 끝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작입니다. 대림절이 곧 펼쳐집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교회력의 순환, 그 안에서 우리는 신비로움과 해후합니다. 끝에서 시작이 태어나고, 기다림 속에 만남의 기쁨이 싹틉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입니다. 반복하는 것 같지만, 매번 다른 자리에 서서 새로운 은총의 빛을 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에게 묻습니다. 이 해가 나를 어떻게 빚었는가? 나의 삶이 그분의 통치 아래 어떻게 깊어졌는가? 곧 맞을 새해, 대림절의 어둠 속에서 다가올 빛에 마음을 열며 다시금 기다림의 걸음을 뗍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가 이미 여기 임하고 있음을 새삼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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